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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스터디

조선 교육기관(feat.향교)

by 풍요천사 하미엘 2024. 3. 6.

조선의 교육기관 1.향교

고려때부터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관학 교육기관. 고려 또한 유교를 중시했고, 사회질서의 근간으로 유교적 사고 유교를 중심으로 정치 권력 구조를 조직하고, 유교를 중심으로 정치 권력구조를 조직하고, 기층사회까지 유교 이념을 침투시키려 노력 했습니다. 반면 지역에서의 교육활동은 지역 세력의 정치 활동에 대한 명분 이었고, 스스로 학원을 세워 유교를 교육, 지역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시스템 이었습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정의 특징이 바로, 향교를 '중앙'이 더욱 장악해 나아가는 모습 입니다.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완성되는 조선은 하향식 교육기관으로 향교를 적극적으로 이용 향교를 통해 유교를 전 백성에서 설파하고, 국왕을 정점으로 한 성리학적 국가관을 주입 했습니다.

한편, 향교 교육은 처음부터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련 과거제도는 유학교육의 성과를 수렴하는 제도로서 기능 조선은 한 고을에 하나의 학교를 설립한다는 기본방침 이었습니다. 전국의 군현 단위로 향교를 건립하여 지방 교육을 활성화 향교는 정책적으로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을 확대, 강화 했었습니다.

향교구조도

향교의 운영을 위해서는 국가의 재정적 지원이 강하게 요구, 향교의 교사등 시설물의 설치.보수.유지, 교수관의 후생비, 교생들의 숙식비, 학업활동에 부수되는 제반비용, 향교를 중심으로 준행되는 석전례.향음례 등에 이르는 비용 향교 운영을 위한 재반비용은 엄청난 규모였고, 조선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시기부터 과거 합격자를 기준으로 '명문 향교'가 존재했고, 서울의 4부 학당 정원 400명에,   생원.진사 초시 합격 예정인원 400명은 100%합격, 반면 각도 향시의 경유는 7%내외의 저조한 합격률,  지배 신분인 양반이 집중되어 있는 한양과는 지방의 엄청난 격차가 있었습니다.

향교는 대부분 도시 중심부에 가까운 위치. 대부분은 고려시대 당시 절이었던 곳 개조해서 향교로 사용했습니다. 향교가 있는 곳은 과거 고을이 위치했던 곳임을 알게 해주는 증거. 교동, 명륜동, 향교리, 교리, 교촌 대체로 향교가 있거나 있었음을 나타내는 동네들입니다.

(하남에 위치한 광주향교)

조선 숙종29년(1703) 옛 광주 관아 서쪽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장소로 옮긴 것으로 추정(정확한 창건 연대 알 수 없음) 가장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있으며, 그 앞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 서재가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 형태 입니다. 대성전 안쪽에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봉안 1983년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향교